1.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
1-1 개요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
생애는 1885년 10월 6일 ~ 1962년 6월 22일
1930년대 미국 산업 안전 선구자
1-2 생애
1886년 10월 6일 버몬트 베닝턴에서 태어났고 한다.
트래블러스 컴퍼니의 공학 및 점검 부서(Engineering and Inspection Division)의
부지배인(Assistant Superintendent)이었으며
당시 1931년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1931년 책에서의 한 가지 경험적 발견은 하인리히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경험적 발견은 그가 일하던 곳에서 통계학적으로 알아낸 일이었다.
일터에서 큰 재해를 일으키는 모든 사고의 경우 사소한 재해를 일으키는 29건의 사고와
재해가 없는 300건의 사고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인리히는 1962년 6월 22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3 하인리히의 법칙
하인리히의 노고는 이 분야의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
행동 기반의 안전 이론을 토대로 두고 있다고 주장되며
모든 작업장의 사고 가운데 95% 정도가
안전하지 않은 행위로 기인한다고 설명된다.
하인리히는 사고를 일으킨 데 대하여
사고의 근본 원인을 세세히 탐구하지 않은 채
대체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난한 감독관이 완성한
수천 건의 사고 보고서를 검토한 뒤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2. 존 가르시아
존 가르시아
(John Garcia
1917년 6월 12일 – 2012년 10월 12일)는
미각연구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였으며,
맛 혐오에 대한
그의 연구로 가장 유명했다.
가르시아(Garcia)는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Berkeley)
에서 공부하여 A.B., M.A.
및 Ph.D를 받았다.
그는 사망 당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명예 교수였다.
이전에는 롱 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 학교 조교수,
하버드 의학전문대학원 외과 강사,
뉴욕 주립대 스토니브룩 심리학과 교수
및 유타 대학교 심리학 교수였다.
2002년에 발간된 일반 심리학 조사에서
가르시아(Garcia)는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
데이비드 루멜하르(David Rumelhart),
루이스 서스톤(Louis Leon Thurstone),
마가렛 플로리 워시번(Margaret Floy Washburn)
및 로버트 S. 우드 워스(Robert S. Woodworth)와
공동으로 20세기 가장 많이 인용된 심리학자로 평가했다.
3. 나르키소스
3-1. 요약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스피아이의 미소년.
3-2. 내용
보이오티아의 강의 신 케피소스(Cephisus)와 님프 리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세이스》에 따르면,
리리오페는 나르키소스를 낳자 테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eiresias)에게
아들이 오래 살 것인지를 물었는데,
테이레시아스는 “자기 자신을 모르면 오래 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용모가 매우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성장한 나르키소스는
동성과 이성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과 님프로부터 구애를 받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년 아메이니아스(Ameinias)는 사랑을 거절당하자 나르키소스가 준 칼로 자살하였다.
숲과 샘의 님프인 에코(Ēchō)도 그를 사랑하였는데,
헤라(Hērā)로부터 귀로 들은 마지막 음절만 되풀이하고
말은 할 수 없는 형벌을 받아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르키소스로부터 무시를 당한 에코는 실의에 잠겨
여위어 가다가 형체는 사라지고 메아리만 남게 되었다.
나르키소스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이들 가운데 하나(이를 에코로 보기도 함)가
나르키소스 역시 똑같은 사랑의 고통을 겪게 해 달라고 빌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이를 들어 주었다.
헬리콘산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으로 다가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고 샘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죽었다.
또는 샘물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한편 고대 유적에 대한 묘사의 정확성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 안내》의 저자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나르키소스는 먼저 죽은 쌍둥이 여동생을 그리워하여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통해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가 죽은 자리에는 시신 대신 한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신분석에서 자기애(自己愛)를 뜻하는 나르시시즘도 나르키소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4. 지그문트 프로이트
[ Sigmund Freud ]
4-1. 요약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의 창시자.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고 최면술을 행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꿈·착각·해학과 같은 정상 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다.
4-2. 생애
출생-사망
1856.5.6 ~ 1939.9.23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심리학
출생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현 체코) 프라이베르크
주요저서
《꿈의 해석》(1900)
4-3. 내용
1856년 5월 6일 모라비아(현 체코) 지방 프라이베르크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세번째 결혼한 아말리에(Amalie)와의 사이에서 지그문트를 낳았다.
그의 이복 형은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했다.
이복 형제들에 비해 어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고 김나지움 7학년 내내 최우수 학생으로 총명했다.
빈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에른스트 브뤼케 실험실에서 신경해부학(Neuroanatomy)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얼마 동안 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연구하였고,
코카인의 마취작용을 연구하여 우울증 치료제로 시도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1885년 파리의 살페트리에르(Salpetriere) 정신병원에서
마르탱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 환자를 관찰하였고,
1889년 여름에는 낭시(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하였고,
18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18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900년 이후 그는 꿈·착각·말실수와 같은 정상 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고, 또 1905년에는 유아성욕론(幼兒性慾論)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초기 그의 학설은 무시되었으나,
1902년경부터 점차 공명하는 사람들
(슈테켈, 아들러, 융, 브로일러)이 나타났으며,
1908년에는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어 잡지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연구연보》(1908∼1914), 《국제정신분석학잡지》 등이 간행되었다.
또 1909년 클라크대학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강연한 일은
정신분석을 미국에 보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변적 경향을 강화하여 이드(id)·자아·초자아(超自我)와
같은 생각과, 생의 본능 에로스·죽음의 본능 타나토스 등의 설을 내세웠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스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암으로 죽었다.
20세기의 사상가로 프로이트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다고 평가되며,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사회심리학·문화인류학·교육학·범죄학·문예비평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저서에는 《히스테리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토템과 터부》(1913), 《정신분석 강의》(1917),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
《자아와 이드》(1923) 등이 있다.
5.데이비드 로젠한
[ Daivid L. Rosenhan ]
5-1. 요약
미국의 심리학자로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 및 법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로젠한 실험으로 유명하다.
5-2. 생애
출생-사망
1929.11.22 ~ 2012.2.6
5-3. 내용
1929년 11월 22일 미국 뉴저지주 저지시티 출생으로,
1951년 예시바대학교에서 수학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콜럼비아대학교에서
1953년 경제학 석사, 1958년에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교육 실험 서비스에서 연구심리학자로 활동하였으며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펜실베니아대학교 심리학과,
1964년부터 1968년까지 프린스톤대학교 심리학과,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스와스모어 칼리지에서 재직하였다.
1971년부터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과와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배심원 선정 및 배심원 상담 등 법정 재판과정에 심리학 방법론을 도입하였다.
80권 이상의 저서와 학술 논문을 남겼으며,
로젠한 실험과 그 결과에 대해 발표한
《정신병원에서 정상으로 살아가기(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 1973)》로 유명하다.
미국과학발전협회의 펠로우, 미국심리학회(APA) 회장,
미국심리-법협회 책임자, 미국법정심리학회 회장, 사회심리 상호교류 연구소 부회장,
정신연구소 책임자, 국립정신의학연구소(NIMH)의 임상 프로젝트 연구 리뷰 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로젠한은 실험심리학을 법정장면에 적용하여
1950년대 시카고대학교 법대에서 배심원 행동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설계하였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배심원 행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로젠한의 주된 관심사는 배심원이 판사가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여기는 증거에 대해서 무시할 때 이를 감내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연구는 이후 심리학과 법학의 학제간 통합적 연구들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아동의 이진법적 선택 반응에서의 이중 대안(Double Alternation in Children's Binary Choice Responses, 1966)』,
『아동에서의 추동 상태로서의 혼자됨과 함께함(Aloness and Togetherness as Drive Conditions in Children, 1966)』,
『타인에 대한 염려의 근원(Some Origins of Concern for Others, 1968)』,
윌리엄 애쉬비(William R. Ashby)와 공동 집필한 『이상심리의 기초(Foundations of abnormal psychology, 1968)』,
『이상-전향(Abnormality-Trans, 1998)』 등이 있다.
6. 헤르만 로르샤흐
헤르만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ˌhɛʁman ˈʁoːʁʃax 또는 ˈʁoːɐ̯ʃax[*]
1884년 11월 8일 ~ 1922년 4월 1일)는 스위스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의학자로,
로르샤흐 검사로 알려진 투사 검사를 고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검사는 자극을 이용한 투사를 통해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의
성격 요인을 임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피검자가 좌우 대칭의 잉크 반점 10개를 한 번에 하나씩 일정 순서로 보고
각 얼룩이 무엇처럼 보이는지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로르샤흐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샤프하우젠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클렉소그라피로 상상력이 가미된 잉크 얼룩 그림을 만드는데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 친구들로부터 클레크(Kleck, 잉크얼룩)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로르샤흐는 미술 선생이었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통 회화를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다가오자 그는 예술과 과학 중
어느 진로를 선택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헤켈이 과학쪽 진로를 제안하자 그는 취리히 대학의 의과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는 카를 융을 가르쳤던 저명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의 제자가 되어
일반정신의학, 특수정신의학 및 임상정신요법학을 공부하였다.
로르샤흐는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906년 베를린에서 유학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휴가를 보냈다.
로르샤흐는 1909년 취리히 의과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러시아 타타르 공화국 카잔 출신의 여성 올가 스템펠린과 약혼하였다.
1913년 말, 그는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스템펠린과 결혼하여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부부는 1917년과 1919년에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았다.
1914년 7월 로르샤흐는 스위스로 돌아와 헤리자우의 지역
정신 병원에서 부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서 지적인 영역을 자극하는 방법에 대해
어린 시절의 잉크 얼룩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같은 잉크 얼룩을 보고 각자 다른 것을 연상하는 것을 발견한 그는
학생들에게 잉크 얼룩을 보여주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의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1857년 독일의 의사 우스티누스 케르너는
우연한 무늬의 잉크 얼룩에서 영감을 받은 시를 담은 책들을 출판했는데,
학자들은 로르샤흐가 이 책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 또한 창조력 검사로써 잉크 얼룩을 실험하였다.
그는 스위스 의사회에서 당시에는 생소했던 정신분석 방법들을 소개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1919년 스위스 정신분석학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잉크 얼룩 검사의 기본 형태를 실은 책
《정신질환 진단》(Psychodiagnostik)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 실린 방법들은 그가 죽은 후에 심리 측정과 정신병 진단에 널리 적용되었다.
책을 쓴 지 1년 후인 1922년 로르샤흐는 충수 파열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 전까지도 헤리자우 병원의 부원장으로 지냈다.
ㅡ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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