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의과 대학
프로이트는 법을 공부하기로 했다가 빈 대학교의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의대를 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에 대한 독서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당시 뱀장어의 생애 주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로이트는 뱀장어의 수컷 생식 기관을 연구하면서 트리에스테의
오스트리아 동물학 연구소에서 4주간 지냈으며, 전임자들보다
별로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채 뱀장어 수백 마리를 해부하였다.
1876년에 그는 "뱀장어의 정소"라는
첫 논문을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보고서
(Mitteilungen der österreich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에
실었는데, 여기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였다.
별달리 성공을 거두지 못해 명성을 얻지 못하자,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바꾸게 된다.
1874년,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는 '생리학 강의'를
출간하여 "정신 역학"의 개념을 제안한다.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을 공식화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연구했던
그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에너지-체계이며, 이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브뤽케는 비엔나 대학교 의과대학 1학년생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임 교수였는데,
프로이트는 그의 새로운 "역학적" 생리학을 받아들였다.
브뤽케의 '생리학 강의'에서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는
하나의 역학계이며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급진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정신 및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였다.
존 보울비(John Bowlby)에 따르면, 화
학과 물리학의 원칙에 기반을 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모델은
브뤼케, 메이네르트, 브로이어, 헬름홀츠, 헤르바르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1879년, 프로이트는 1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수행하고
자 연구를 잠시 접어두었으며,
1881년에 논문 "하급 어류종의 척수에 관하여"
(Über das Ruckenmark niederer Fischarten)로 의학 박사(M.D.)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트와 정신 분석
1885년 10월 프로이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공동 연구차 파리에 갔다.
그는 이 때 파리에 체류한 경험이 재정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신경학 연구 대신, 정신 병리치료로 진로를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샤르코는 히스테리와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을 전공하였으며,
그는 청중 앞 무대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자주 시연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이트는 최면 기법을
더이상 치료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유 연상과 꿈 분석을 선호하게 된다.
샤르코 자신도 말년에 히스테리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였다.
1886년에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한다.
그 뒤 자신의 신경과 진료소를 차린다.
아내의 아버지 베르만은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였던
이작 베르나이스의 아들이었다.
프로이트는 신경계 환자들에게 최면 기법을 실험하였으나
많은 대상자들에게 최면이 쓸모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이 치료 방식을 포기하였으며, 환자와 본인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치료법을 썼다.
이 방식은 "대화 치료"로 알려지게 되는데,
대화의 최종적인 목적은 환자가 처음에 거부하고 있으며
무의식에 갇힌 강력한 감정 에너지를 풀어주어 위치짓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환자가 어떤 감정을 거부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이것이 종종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에 해를 끼치며 육체적 기능까지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정신 신체증"(심신증)이라고 설명하였다.
("대화 기법"이란 용어는 원래 프로이트의 동료인
요제프 브로이어의 환자인 안나 O.(Anna O.)가 만든 말이었다) "대화 기법"은
정신 분석학의 기초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나이 40대에 프로이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 그 밖에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발달의
변천에 대해 탐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1896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또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비평하는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카를 융이었다.
두 사람이 결별한 이유는 융이 종교와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지고 다룬 탓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말년
1930년,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 상을 받았다.
3년 뒤에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였으며,
이들이 불태우고 없앤 책 가운데서도 프로이트의 책이 특히 두드러졌다.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에서 반유대주의 감정이 들끓었으며,
프로이트와 가족의 집에는 비밀 경찰들이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또 비엔나 정신 분석 학회가 해산당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책과 재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프로이트는 "자유롭게 죽기 위하여"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그와 가족은 1938년 6월에 비엔나를 떠나
런던 햄프스티드의 20 메어스필드 가든스
(20 Maresfield Gardens, 현재의 프로이트 뮤지엄)로 이주하였다.
스위스 코티지 근처에 벨사이즈 길(Belsize Lane)과
피츠존 거리(Fitzjohn's Avenue)의 한쪽 모퉁이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프로이트는 구강암 때문에
생전에 30번이 넘도록 수술을 받았다.
1939년 9월에 그는 의사이자 친구인 막스 슈어를
설득하여 자살을 돕도록 하였다.
프로이트는 미완성 원고 <정신 분석학 개관>을 남겨두고
1939년 9월 23일에 죽었으며, 죽은 지 사흘 뒤에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생애
1856년 - 5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라이베르크인메렌에서 태어남.
1866년 -
오스트리아 빈의 김나지움에 입학.
1873년 -
빈 대학의 과학부에 들어갔으나, 곧 의학부로 옮김.
1877년 -
가재의 신경 세포에 관하여 오늘날의 세포설에 가까운 이론을 발표함.
1882년 -
7월, 경제적인 이유로 연구 생활을 그만두고, 빈 대학 부속 병원 수련의가 됨.
1884년 -
코카인의 마취 작용에 대한 논문 《코카인에 대하여》를 발표함.
1885년 -
가을, 파리에 유학. 샤르코 교수에게 히스테리 이론을 배워 본격적으로 신경증을 연구하게 됨.
1886년
4월, 빈에서 병원을 열고, 신경증 환자 치료를 시작함.
9월, 유대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함.
1891년 -
최초의 저서인 《실어증의 이해를 위하여》가 나왔으나, 혹평을 받음.
1895년 -
브로이어와 같이 《히스테리 연구》를 펴냄.
1896년 -
'정신분석'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함. 가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정신분석을 시작함.
1900년 -
자신의 정신분석과 꿈의 분석을 담은 《꿈의 해석》을 출간함.
1901년 -
《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를 발표하여, 우발적 행위의 의미를 명백히 함.
1905년 -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를 집필함.
1906년 -
정신분석학의 지지자인 카를 융과 만남.
1908년 -
4월, 잘츠부르크에서 제1회 국제 정신분석학 대회를 개최함.
1909년 -
9월, 클라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연함.
1910년 -
국제 정신분석 학회가 정식으로 발족됨.
1912년 -
《이마고(Imago)》를 창간하여 〈토템과 터부〉를 연재함.
1914년 -
《정신분석 운동사》, 《미켈란젤로의 모세》를 출간함.
1915년 -
빈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를 시작함.
1917년 -
《정신분석학 입문》을 출간함.
1922년 -
4월, 구개암 수술을 받음. 이후 죽을 때까지 32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연구와 치료에 힘씀.
1923년 - 4월,
《자아와 원초아》를 저술하여, 자아와 원초아의 개념을 제창함.
1930년 -
괴테 문학상을 받음.
1938년 - 6월,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함.
1939년 - 9월 23일,
《정신분석학 개론》을 집필하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 출처: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출판사)
생애를 이론들과 함께 보며 덧붙이자면,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에 유학하며
장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 교수의
수업에서 최면을 접한 이후로 당시 최면치료를 하던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와 가까이 지내며
최면을 배워 치료를 진행한다.
안나 오(Anna O)라는 신경증 환자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최면치료는 일시적으로 증상의 호전을 보이고
가능한 대상이 한정적이라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이후 압박법에서 자유연상법 순으로 치료법을 발전시키게 되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분석학의 틀을 잡는다.
이 과정에서 성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브로이어와는 결별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많은 신경증 환자를 돌본 치료자이기도 하였으나,
자신 역시도 불면증과 우울증을 비롯한 수많은 신경증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그의 연구 중에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며
얻은 결론을 토대로 세워진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꿈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 같은 것들이 그의 아버지 사후 자기관찰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
이 외에도 로마에 맞서 싸운 한니발 장군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로마에 갈 수 없어 노년에 자기관찰을 끝내고 나서야 갔다던지 하는
얘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골초였기에 67세이던 1923년
구강암 진단을 받고 무려 16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말이 어눌해져서 진료상황을 환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를 못하자 딸인 안나가 대신 말해줄 정도.
1939년 9월 21일에 주치의인 막스 슈어(Max Schur) 박사에게
자신의 안락사를 요구해서 9월 21일과 22일에 모르핀을
각각 한 차례씩 투약을 받았고 다음날인 9월 23일에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 가계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1815 ~ 1896)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 (1835 ~ 1930)
이복형 에마누엘 프로이트 (1833 ~ 1914)
이복형 필리프 프로이트 (1836 ~ 1911)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 1939)
妻 마르타 베르나이스 (1861 ~ 1951) - 1886년 결혼
마틸데 프로이트 (1887 ~ 1978)
장-마르틴 프로이트 (1889 ~ 1967)
올리버 프로이트 (1891 ~ 1969)
에른스트 프로이트 (1892 ~ 1970)
루시안 프로이트 (1922 ~ 2011) 화가
조피 프로이트 (1893 ~ 1920)
안나 프로이트 (1895 ~ 1982)[27]
율리우스 프로이트 (1857 ~ 1858)
안나 프로이트 (1858 ~ 1955) - 1890년대 미국으로 이민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 ~ 1995) - 저명한 언론인
레기나 데보라 (1860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마리 프로이트 (1861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에스더 아돌피네 프로이트 (1862 ~ 1942) - 홀로코스트 희생자
파울린 레기네 프로이트 (1864 ~ 1943) - 홀로코스트 희생자
알렉산더 고톨트 프로이트 (1866 ~ 1943)
성공한 학자라고 평가받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제각기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리고 가족들이 프로이트 바로 밑 동생 율리우스랑 딸 조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80세를 넘거나 80세 가까이 장수하였다.
어머니도 당대에 무려 95세까지 장수했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홀로코스트 피해를 안 받은 여동생도
97세까지 살았을 정도.
홀로코스트 피해를 받아 죽은 여동생들도
80세 언저리까지 장수한 것을 보면
홀로코스트 피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1940년대 후반까지 생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슬하 여섯 아이들 중 넷째 에른스트는 건축가로,
막내 안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하다.
한편 프로이트의 여동생인 앤나 버네이스(결혼 후의 성)의 아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조카가 언론(public relation)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버네이스이다.
그는 심리 분석을 이용한 선동 및 광고에 능하여
프로파간다의 대부로 불렸으며, 심지어 괴벨스마저
그의 방식을 배우려 노력했다고 한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과
언론을 창시한 후덜덜한 집안.
과테말라 전복에도 상당히 관여된 선동가로
히틀러가 그를 섭외하려 노력한 것은 위의 빅데이터가 의미심장하다.
1938년 안슐루스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갔을 때
그의 자식과 손자들도 같이 영국으로 망명가게 되는데,
그 손자 중 하나가 바로 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루시안 프로이트이다.
그의 작품 중 하나는 생존화가 작품으로 최대가를 찍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2011년에 별세.
루시안의 형제 클레멘트는 정치인이자
방송가, 작가로 Sir 칭호까지 받았다.
프로이트의 증손자 데이비드 프로이트(1950년생)도
영국 귀족원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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